왜 자유가 중요한가?왜 평등이 중요한가?왜 사랑이 중요한가?왜 건강이 중요한가?왜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가?왜 삶이 중요한가?
나는 이 이름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이름만으로 최종가치라고 두지 않는다. 각각이 경험에 무엇을 하는지 다시 묻는다.
자유는 가능한 행동과 경험의 폭을, 평등은 경험의 분포를, 사랑은 관계와 정서의 경험을, 건강은 통증과 활동 가능성을, 수명은 경험의 지속 가능성을 바꾼다. 이 가치들은 직접 경험이 되기도 하고 다른 경험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름의 권위가 아니라 그것들이 경험에 무엇을 하는가다.
삶도 같은 질문 앞에 놓인다. 생명의 양이 많고 오래 지속된다는 사실만으로 그것이 왜 좋은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박테리아와 식물이 경험하지 않는다고 가정한다면, 그것들이 끝없이 번성하는 세계에 경험이 전혀 없는 경우 그 생명의 양 자체를 최종가치라고 볼 이유를 나는 찾지 못한다.
인간의 몸도 마찬가지다. 경험이 영구히 전혀 발생하지 않는 상태를 사고실험으로 가정한다면, 생물학적 기능의 지속 자체가 왜 최종적으로 좋은지 다시 물어야 한다.
삶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경험을 발생시키는 현재까지 알려진 주요 형태이기 때문이다. 의식도 내가 ‘경험이 발생하는 상태 또는 능력’이라고 부른다면, 그 이름 자체보다 그곳에서 경험이 발생한다는 점 때문에 중요하다.
질문을 계속 아래로 내리면 나는 경험에 도착한다.
경험의 질과 양은 왜 중요한가?
나는 모든 규범이 결국 증명할 수 없는 믿음에 기반한다고 본다. 사실만으로 무엇을 좋다고 해야 하는지가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나의 how도 예외가 아니다.
나는 경험의 질과 양을 높이는 것이 좋다고 믿는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규범적 믿음이다. 나는 그 기준을 EQQ, 경험의 질과 양이라고 부른다.
고통도 경험이다. 고문도 경험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을 늘리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음의 경험을 줄이려 한다. 경험의 양이 늘어난다고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질을 빼고 양만 늘리는 것은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다.
경험은 인간의 삶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생물학적 생명이 아닌 AI에게 경험이 있다면 그 경험에도 이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반대로 생물학적 생명이 있어도 경험이 전혀 없다면, 그 생명 자체가 EQQ를 직접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죽음 이후에는 경험이 없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도 경험이 있다면 그것을 고려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내가 기준으로 삼는 것은 경험이다.
EQQ는 외부에서 발견되는 객관적 점수라고 보지 않는다. 경험의 질은 경험주체에게서 발생한다. 외부 관찰자가 그 주체의 ‘진짜 EQQ’를 별도로 보유하고 있다고 가정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