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w · 05

자기 EQQ에서 여러 EQQ로

책임범위와 우선순위

EQQ는 충돌의 답안지가 아니라 구조를 드러내는 번역기다.

WHAT에서 나는 선택을 더 많은 ‘나’를 거친 반응으로 보았다. 이제 how에서는 그 선택이 무엇을 향하는지 묻는다.

선택의 이유를 끝까지 추적하면 자기 EQQ에 닿는다.

이 주장은 EQQ를 선택으로 정의해서 얻은 항진명제가 아니다. EQQ는 선택과 독립적으로 경험의 질과 양을 뜻한다. 내가 주장하는 것은 선택의 이유를 계속 추적하면 결국 그 주체에게 무엇이 더 좋게, 덜 나쁘게, 더 견딜 만하게 경험되는가에 닿는다는 것이다.

타인의 행복, 정의, 사랑, 책임, 신념도 선택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이 실제로 나를 움직이려면 그것들이 나에게 중요해야 한다. ‘저 사람에게 좋은 일’이 내 선택의 이유가 되는 것은, 그 일이 나의 경험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좋은 것 또는 중요한 것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래서 희생도 자기 EQQ를 버린 행동이라고 보지 않는다.

사실을 잘못 알거나 미래의 경험을 잘못 예측할 수는 있다. 선택에 대한 평가는 시간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어느 시점의 평가도 객관적인 최종심이라고 미리 정할 근거는 없다. 각각은 그 시점에 발생한 새로운 경험과 평가다.

자기 EQQ를 추구한다는 것은 좁은 이기심을 뜻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의 행복, 가족의 안녕, 국가의 미래, 인류의 가능성이 자신의 경험을 깊게 구성할 수 있다. 내가 ‘그릇이 큰 사람’이라고 부르고 싶은 경우도 여기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릇의 크기는 자기 EQQ와 깊게 연결되어 있는 경험의 범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공동의 판단을 시작하면 질문이 달라진다.

가족, 조직, 국가, 인류를 하나의 경험주체라고 가정할 필요는 없다. ‘국가의 EQQ’라는 표현은 국가가 하나의 경험을 한다는 뜻이라기보다, 국가라는 책임범위 안의 여러 경험을 판단 대상으로 삼는다는 뜻에 가깝다.

누구의 EQQ를, 어디까지 고려할 것인가?

개인에서 가족과 조직, 국가와 인류로 범위가 넓어질 수 있다. 그리고 경험하는 동물이나 AI가 존재한다면 고려범위는 다시 넓어진다. 경험이 있다면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그 경험을 EQQ의 범위에서 지울 수는 없다. 미래의 경험주체도 같은 질문 안에 들어온다.

그 다음에는 결합의 문제가 남는다. 개인들의 EQQ를 단순히 더할 것인가. 가장 낮은 사람을 더 중시할 것인가. 극심한 고통에 더 큰 무게를 둘 것인가. 현재와 미래를 어떻게 함께 볼 것인가. 경험 여부가 불확실한 존재는 어떻게 다룰 것인가.

서로 다른 자기 EQQ가 충돌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창조에서, 누군가는 관계에서, 누군가는 사명에서 자신의 EQQ를 얻는다. 타인을 해치는 데서 강한 긍정적 경험을 얻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EQQ라는 이름을 공유한다고 목적이 자동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는 어떤 경험을 보호하고 어떤 행동을 제한할지 규칙을 만든다. 당사자가 동의하지 않아도 강제는 일어날 수 있다. 나는 그 강제를 우주가 내려준 선악의 판결이라고 보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경험들을 지키고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지에 관한 집단적 판단과 행동으로 본다.

그 판단 역시 다시 번역해야 한다. 누구의 경험을 포함했는가. 어떤 손실과 이익을 비교했는가. 분포와 극단적 고통을 어떻게 다뤘는가. 제도 뒤의 힘은 누구의 EQQ를 위해 작동하는가.

나는 모든 경험이 같은 크기와 깊이를 갖는다고 보지 않는다. 경험에는 풍부함과 깊이의 차이가 있다고 본다. 현재 나는 인간이 매우 풍부하고 깊은 경험을 하는 존재라고 추정한다. 미래의 AI가 인간보다 더 풍부하고 깊은 경험을 한다면 그 경험 역시 고려범위에 들어와야 한다.

다만 경험의 깊이가 EQQ의 질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 서로 다른 주체의 고통과 기쁨을 어떻게 비교할지는 아직 열린 질문이다.

EQQ는 이 문제들의 답안지가 아니다. 누구의 경험을 어디까지 포함하고, 충돌하는 경험들을 어떻게 비교하고, 어떤 규칙을 만들 것인지의 구조를 더 정확히 드러내는 번역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