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발전한 문명은 자신과 같은 존재들이 살아가는 시뮬레이션을 만들 수 있을까. 만들 수 있다면 하나만 만들까. 시뮬레이션 안에서 다시 시뮬레이션이 만들어질 수도 있다.
보스트롬의 논증은 그 전제 아래에서 적어도 세 명제 중 하나가 참이라고 말한다. 인간 수준의 문명 중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 도달하는 비율이 거의 없거나, 그 단계에 도달한 문명 중 조상 시뮬레이션을 만드는 데 관심을 갖는 비율이 거의 없거나, 우리 같은 경험을 하는 존재 대부분이 시뮬레이션 안에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 셋 가운데 세 번째를 앞의 둘보다 직관적으로 높게 본다.
하지만 이 추론이 성립하려면 시뮬레이션 안에서 실제 경험이 발생해야 한다. 화면 속에 백만 명이 나타나도 모두 경험하지 않는 존재라면, 백만 명의 경험자가 생긴 것은 아니다. 그 경험자들의 비율을 내가 시뮬레이션 안에 있을 확률에 적용할 수 있다는 추론도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인물을 경험하는 존재로 만들 필요는 없을 수 있다. 통 속의 뇌처럼 하나의 경험하는 존재에게 필요한 세상만 보여준다면 우주 전체를 언제나 모두 계산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주 전체를 계산하기에는 자원이 부족하다는 반론도 결정적이지 않다. 시뮬레이션 밖의 시스템이 이 세계와 같은 물리학과 한계를 갖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반론이 틀렸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의 기준을 밖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세계의 모든 법칙을 이해하면 시뮬레이션 여부를 파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임을 아는 것과 그 밖의 세계를 아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밖의 세계가 무엇인지, 그곳을 알거나 오갈 수 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가늠하기 어렵다.
만약 이 세계를 만들거나 운영하는 존재가 있다면 그것을 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렇게 부르더라도 전지와 전능, 선함과 숭배의 의무까지 따라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그 존재와 이름 모두 질문으로 남긴다.
어느 경우에도 처음의 문장은 남는다.
나는 경험한다.